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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과연 헌법재판소의 선택은

밥 에드워드와 스콧 암스트롱은 저서『The Brethren』을 통해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연방 대법원의 내부를 조명했다. 한국어로는 『지혜의 아홉 기둥』으로 번역된 이 책은 12명의 대법관 중 11명의 사무실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는 과정과 판사들 간의 관계,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법적 판단의 논리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이 책에는 판사 간의 협력과 갈등, 그리고 법적 원칙과 정치적 압력이 얽힌 복잡한 과정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법적 판단이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과 현실의 괴리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미국의 보수와 진보는 서로 달라도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구사한다. 보수는 전통적 가치와 자유를 중요시하고 정부 개입을 최소화와 자유시장 경제를 지지한다. 정책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전통적인 가족 모델이나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정책이 우선이다.     반면 진보는 변화와 평등,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며 정부의 개입과 복지 확대를 지지한다. 환경 보호나 인권 보호, 사회적 안전망 확장 등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정책이 우선이라고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대법원 판사들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최대치를 구하고 협력한다.   한국의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와는 다르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안보 문제에서도 큰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념적 차이가 좌우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사회적 갈등은 국가의 발전과 사회적 통합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분단국가로 남북 관계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보수는 강경한 대북 정책을 선호한다. 북한의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을 강력히 반대하고, 안보 강화와 UN의 결의를 준수함과 동시에 한미일 안보협의체를 유지하는데 주력한다.   이에 반해 진보는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이미 6·25 동란과 각종 군사 도발 그리고 미사일과 핵무기 등 북한의 대남전략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협상을 통한 평화는 북한에 이용만 당한 정책이었다.요즈음 세계가 한국의 헌법재판소에 쏠려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 동포사회에서도 탄핵에 대한 찬반논란이 뜨겁다. 특이한 것은 보수와 진보의 확연히 다른 주장이다.     진보는 윤 대통령이 시대착오적인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정과 국격을 실추시킨 내란 우두머리로 낙인찍고 탄핵 찬성을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이에 맞서 보수는 부정선거와 중범죄 혐의를 받는 당 대표자를 지키려고 정부 관료 등 탄핵을 남발하고, 망국적 예산 폭거를 자행했다며 ‘비상계엄’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탄핵반대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이제 모두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린다. 문제는 어느 당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임명되었느냐에 따라 재판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염려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로 인해 재판관의 성향이 낱낱이 드러나고, 어느 쪽이냐에 타라 재판관에 대한 이념으로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헌법재판관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판결의 내용은 다양한 법적, 사회적 요소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예측을 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념적인 굴레에 덮여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엄동설한에도 길거리로 나와 찬반을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헌법재판소는 헌법과 법률을 근거로 한 독립적인 기관으로, 재판관의 판결이 사상적 이념을 떠나 정치적인 압력과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사회적 통합이나 갈등 해소에 기여할 수 있다. 재판관 모두는 이념을 떠나 ‘The Brethren’의 재판관들처럼 공정하길 바란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헌법재판소 선택 정치적 사회적 사회적 갈등 사회적 불평등

2025-02-11

[이 아침에] 이 세상은 너와 나의 공존이다

모처럼 남가주에 비가 내렸다. 비 온 후라 뒷마당에 피어있는 초목들이 싱그러워 보이고, 꽃들도 아름답다. 해맑은 햇살은 더욱 정답다.   오랫동안 건조한 탓에 한동안 대형산불의 재앙이 남가주 곳곳을 휩쓸었다. 그런 때문인지 추운 겨울인데도 이번 비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츠리게 하기 보단 오히려 활짝 펴게 해준다. 혹시 꺼지지않고 남아 있을지도 모를 화마의 불씨마저 사라질 거라고 안심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사람 사는 일이 어찌 날씨나 환경에 국한되겠는가. 요사이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는 기후 못지 않게 불안하고 염려스럽다.  새로 들어선 트럼프 정부의 첫 과제가 천만 명이 넘는 불체자들의 추방 문제라니 춥고 걱정스럽다. 내 일이 아니니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남의 고통 앞에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떠나온 조국의 정치도 불안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염려스럽다. 현직 대통령이 내란죄 명목으로 구속되어 재판중이니 이보다 더한 재앙이 없다.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릴 듯 위협한 최근 남가주 산불 같은 형국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무섭던 산불도 진압되고, 정치적 갈등도 정리될 것이지만, 재앙들이 남기고 갈 아픔의 흔적과 상처는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 몸살을 앓게 할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너와 나’의 공존이다. 싫다고 해서 피할 수도 없고, 좋다고 해서 제멋대로 자기 생각 만으로만 살 수 없는 공동운명체라는 말이다.   마치 우리 ‘몸’의 각 기관과 조직들이 함께 어울려야 건강을 유지하듯, 우리 사회도 개인과 각 단체가 잘 소통하고 협력해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기에 말이다.     우리 삶에서 많은 문제의  해답은 그래서 ‘다양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달려있다. 뒷마당의 정원이 아름다운 이유가 똑같은 한가지 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온갖 종류의 꽃들이 ‘함께’ 어울려 피어 있기 때문 아닐까.만약 정원에 자기가 좋아하는 한가지 꽃만 피어 있다면 얼마나 단조로울까. 마치 오래 보아온 집안의 가구처럼 더 이상 관심을 끌 수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형태의 다양한 존재들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나와 다른 모습, 나와 다른 생각과 개성을 지닌 이웃이 있기에 삶이 더욱 신비스럽고 재미있고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서로 다른 성적성향이 있기에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끌리고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다양성의 축복 아닌가.   외모뿐만 아니라 각자의 ‘생각’ 또한 정원의 꽃처럼 각양각색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이 다름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닌, 서로 다른 ‘다양성’의 의미다.     하여,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니는 다양성을 인정할 때,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대신 마음을 열고 남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상대방의 생각에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로 비록 상대방의 생각이나 말이 내가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상대방을 비난하고 적대시하는 대신, 상대방의 처지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긍정마인드에서 나온 배려로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을 개방한다는 의미다.   이같은 배려로 상대방에게 마음의 문을 열면 가정에서는 물론 직장이나 사회 안에서도 많은 갈등이 해소되리라 믿는다. 이건 살면서 터득되는, 누구나 쉽게 체험할 수 있는 평범한 삶의 ‘상식’이다. 실제로  개인이나 단체의 갈등과 반목은 많은 경우 서로 다른 생각을 ‘흑/백’논리로 이분화시키려는 유혹에서 기인한다. 흑백논리 같은 이분법 사고가 개인과 사회에 만연되면, 서로 생각이 인정받지 못하기에 서로 비난하고 적대시하며 ‘패거리’현상이 벌어 질 수밖에 없게 되어간다. 그 예가 바로 우리가 떠나온 조국의 가슴 아픈 현재 정치 현안 아닌가.   더 큰 문제는 이런 사회적 갈등의 피해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서로 상대방을 배척하는 당사자들에게만 국한되지않고, 함께 사는 모든 국민 몫으로 남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정말 너무나 참기 힘든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남을 인정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평범한 삶의 상식이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꽃처럼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 오늘도 간절해진다. 김재동 / 가톨릭 부제·의사이 아침에 공존 대신 상대방 정치적 갈등 사회적 갈등

2025-02-02

[열린광장]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

현재 한국 사회에는 분열과 편 가르기의 이분법적 증오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상대 집단을 집요하게 혐오하고 공격한다. 이런 행동은 실체적 진실은 외면하고 자신의 사고와 일치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 편향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며 편견에 치우친 폭력이다.     상대방을 매도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자신의 공격적 태도나 행동도 정당화시킨다. 이들은 본인이 속한 단체의 내부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기 때문에 비이성적인 편견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특히 한국의 정치는 머리와 가슴을 짓이기는 이분법적 격돌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격돌 정치의 한복판에 있는 정치인들도 한때는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올랐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래서 국민은 그들을 대표자로 선출했다. 하지만 정치 현장에서 그들은 사유 능력이 없는 꼭두각시의 모습을 보이며 국민을 실망하게 하고 있다.     지난 1961년 ‘뉴요크’지에 실린 한나 아렌트의 기사는 자기 주도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없이 상관의 지시만을 따른 한 정치인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 저자이며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한나 아렌트는 히틀러의 최측근 친위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취재했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한 후 살해한 주범이었다. 그런데 재판을 참관하고 돌아온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그 시대 최고의 악랄한 범죄자 중 한 명이 되게 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상관의 지시를 따르기만 했을 뿐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은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자세히 관찰하면, 갈등을 통해 이득을 얻는 기득권 세력들의 의도적인 조작 때문에 적대감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들이 이러한 조작과 반목을 부추기도록 만든 시스템과 제도들을 감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사회적 메커니즘들이 조직적으로 우리를 서로 반목하게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서로 반목하는 대신 힘을 모아 그런 악의적인 시스템과 제도를 타파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공유적 인간애를 구축함으로써 연대감을 강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로의 다름이 우리가 위험한 집단사고의 난관에 봉착하지 않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증오의 반대는 상호 연대를 통해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증오를 끝낼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공통적인 인간성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설득할 뿐 아니라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라번대학 겸임교수열린광장 존중 사회 사회적 갈등 사회적 메커니즘들 한나 아렌트

2023-09-19

[문장으로 읽는 책] 철학으로 휴식하라

유치원생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높고 표정도 밝다. 저마다 칭찬받을 거리가 하나씩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나이 먹을수록 자신감은 점점 떨어지며 낯빛도 어두워진다. 세상의 인정을 받는 길이 돈과 명예, 권력 등 몇 개로 단순화되는 탓이다. 월저는 ‘다원적 평등’을 강조한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존경받지 못할 사람들도 다른 면에서는 명예롭게 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안광복 『철학으로 휴식하라』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에게도 인정받을 무엇인가가 있다면 상 받는 이에 대한 질투심도 수그러든다. 내가 속한 집단은 과연 구성원 하나하나의 노력을 보듬을 만큼 다양한 평가 잣대를 갖고 있을까?” 실제 그렇다. 많은 사회적 갈등과 개인적 불행이 질시와 박탈감에서 비롯된다. 모든 존재가 고루 다양하게 존중받고 인정받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인용문 속 월저는 미국의 정치 철학자 마이클 월저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로 일하는 저자는 철학에서 일상의 지혜를 찾는 ‘임상철학자’를 표방한다. 책 제목은 “자주 철학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따왔다. “좋은 인생을 사는 이들은 쾌락을 좇지 않고 겪어야 할 감정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인생의 모든 순간에 내가 주인공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50대는 박수받는 나이가 아니라 박수 치는 나이여야 한다” 등의 구절이 눈길을 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철학 휴식 정치 철학자 사회적 갈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20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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